2011.11.01 00:00

피타고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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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타고라스 피타고라스는 태어난 날과 죽은 날이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책 한권 남기지 않았다. 오로지 아는 거라고는 피타고라스가 기원전 569년경 사모스 섬에서 태어났고 기원전 500년경 이탈이아 남단의 크로톤(지금의 크로토나)이라는 곳에서 생을 마감했다는 정도이다. 열여덟 살 때, 그는 올림픽 경기에 참가해서 권투경기에서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후 가까운 이오니아로 가서 탈레스와 아낙시만드로스의 문하생으로 몇 년간 학문을 닦았다. 그 뒤 시리아로 건너가 페니키아의 현인들 곁에 머물던 중 그들의 인도로 비블로스 비교에 입문하기도 했다. 그 다음 지금의 레바논 지역에 있던 카르멜 산으로 입산했다. 그곳에서 이집트로 건너가 20여년을 지냈다. 그는 오랫동안 나일 강 연안의 여러 신전을 다니며 이집트 제관들의 가르침을 받았다. 페르시아가 이집트를 침략한 거도 바로 그때였으며 그가 포로가 되어 바빌로니아로 끌려간 것도 바로 그 때였다. 그는 거기에서도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 메소포타미아의 중심지였던 그곳에서 보낸 12년 동안 바빌로니아의 점성술사들과 서기들로부터 방대한 지식을 전수받은 후 40년 전에 떠나왔던 사모스 섬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사모스는 당시 참주인 폴리크라테스가 통치하던 시기였고 피타고라스는 압제자들을 몹시도 싫어했다. 결국 그는 다시 길을 떠났다. 이번에는 서쪽으로 해서 마그나그라이키아 연안국으로 갔다. 그래서 이탈리아 남부의 시바리스에 도착했다. 당시 그리스에서 시바리스는 환락의 도시로 아주 이름난 곳이었다. 그러나 피타고라스는 크로톤이라는 인근도시에 정착했다. 거기에서 자신의 '학파'를 창설하기에 이른다. 이 학교에는 학문에 뜻을 두고 진리를 갈구하는 많은 젊은 학도들이 구름같이 모여 들었다. 피타고라스 학파는 약 150년에 걸쳐 그 명맥이 유지됐으며 정확히 218명의 학자가 배출되었다. 이들 모두가 수학자였던 것은 아니다. 유명한 수학자들로는 키오스의 히포크라테스, 키레네의 테오도로스, 필로라오스, 타렌툼의 아르키다스, 그리고 히파소스 등이 있다. 그 당시 공개 석상에 나오지 못하게 되어 있던 여자들까지도 앞을 다투어 그의 강의를 들었다고 한다. 학생들을 '피타고라스 학도'라는 정식 학생과 청강생으로 나누었고, '그리스인 중 가장 현명하고 가장 용감한 자'라는 존칭을 받은 피타고라스는 흰 까운에 별 모양의 5각형 무늬를 새긴 황금관을 쓰고 위풍 당당하게 교단에 섰다고 한다. 피타고라스 학파의 내용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이중적인 의미를 지닌 용어로 씌어져 일반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것과 비법을 전수받은 정식 수학자들만을 위한 것, 이렇게 수준에 따라 두 가지로 만들어졌다. 또 지식의 대부분은 입에서 입으로만 전달됐는데, 이러한 전달 방식에 따라 또다시 두 부류로 나뉘어졌다. 곧, 결과는 전달받되 그 결과에 이르는 과정에 대한 증명은 전달받지 못하는 청강자와 결과와 증명을 모두 전달받을 수 있는 정식 수학자들이다. 피타고라스의 정식 학도가 되기 위해서는 전 재산을 맡기도록 되어 있었으며 그들은 간소한 생활, 엄격한 교리, 극기, 절제, 순결, 순종의 미덕 증진을 목적으로 단체 행동을 하며 전심전력을 다하였다. 그리하여 이 교단은 일대 세력을 갖게 되었고, 각 방면에서 선망의 대상이 된 동시에 질시의 표적이 되어, 드디어 정치적 반대파로부터 불의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피타고라스당의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고 부녀자들을 배에 태워 시실 방면으로 미리 피난시키고 피타고라스를 호위하면서 메소포타미아쪽으로 도망을 갔으나 추격은 점점 심해지고, 따르는 문하생도 하나 둘씩 떨어져나가 드디어 피타고라스는 체포되어 살해되고 말았다. 그리스 7현 중의 한 사람인 그의 말로는 아르키메데스처럼 비장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피타고라스 학파 사람들은 비밀을 엄수하였으므로, 누가 어떤 발견을 하였는지 알 길이 없고, 발견은 모두 피타고라스가 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피타고라스의 정리에 관해서는 데오게네스·라에주스와 플루타크는 "피타고라스가 이 정리의 증명을 성공하였을 때, 너무 기뻐서 100마리의 황소를 잡아 신에게 바쳤다."라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반대설도 있으며, 피타고라스는 "영혼은 불멸하고 윤회 이전하는 것"이라고 믿었으므로 피를 흘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에게 바친 것도 살아있는 소가 아니고, 밀가루로 만든 소 한 마리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피타고라스는 이 정리 발견의 힌트를 길가에 깔린 타일을 보고 얻었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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