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1.01 00:00

르네 데카르트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르네 데카르트 1. 근대 과학의 아버지 수학사를 읽어 보면, 17세기 전반에 있어서의 최대의 수학자라 하면 해석기하학의 창시 자로 유명한 르네·데카르트(Rene Descartes ; 1596~1650)로 되어 있는데, 그는 수학사에서 뿐 만 아니라 철학사에 있어서도 근세철학의 시조로서도 이름이 높다. 또 물리학은 물론이고 의학 연구에도 훌륭한 업적을 쌓아, 근대 자연과학의 아버지라고 불리우고 있다. 이제, 근대수학의 기초를 이룩한 대 수학자 데카르트의 과학자적인 생애를 더듬어 보기 로 하자. 2. 라 플레슈에서의 유년 시대 데카르트는 1596년 3월 31일 프랑스의 토오레느주의 매혹적인 한 작은 도시 라에이에 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소귀족으로서 대대로 오랫동안 관직에 있었다. 부친은 브레타뉴 의 법관 귀족의 상담역으로 있었으며, 모친은 르네가 태어난지 한 달만에 세상을 떠났다. 르네는 그 모친으로부터 상당한 재산을 유산으로 받았는데, 이것이 후년 르네가 경제적으 로 자립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르네는 어려서부터 체질이 약했기 때문에 그리 장생 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으나, 그 자신은 어쩔 수 없는 이 악 조건을 오히려 공부에 대한 초기의 정열을 충족시키는 데 선용 했다. 10살 때, 그의 부친은 그를 유태인이 관리하고 있는 라 플레슈(La Fleche)의 학교에 입학 시켜 그 곳에서 공부하도록 하였다. 8년 동안 이 학교에 다니면서 르네는 논리학, 윤리학, 물리학과 형이상학, 유클리트 기하학과 새로운 대수학 및 갈릴레이의 망원경에 의한 최신 업적에 이르기까지 아주 훌륭한 교육을 받았다. 이곳에서 르네는 평생을 통하여 변하지 않았던 하나의 습관이 몸에 붙게 되었다. 즉, 그 는 아침 늦게까지 침대에 누워 있어도 된다는 특별한 허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고독한 집중적 사고라는 선천적인 습성에 충분하도록 몸을 담글 수가 있었던 것이다. 3. 베에크만을 만나다 20세 때, 르네는 쁘와띠에(Poitiers) 대학에서 법학사의 학위를 받고 나서 파리로 돌아왔 다. 그곳에서 그는 방탕한 생활에 젖기도하여 사교계의 플레이보이가 되기도 하였으나 얼 마 가지 않아 이에 실증을 느끼고, 원래대로 수학과 철학에 심혈을 기울이게 되었다. 르네가 다시금 용기를 얻는 데 큰 역할을 한 사람은 한 수도사 메르센느였다. 르네와 메 르센느는 라 플레슈 시절부터 아는 사이였으며, 메르센느가 죽을 때까지 르네와는 아주 절 친한 교우 관계를 유지 하였다. 1628년 르네가 마지막으로 프랑스를 떠난뒤에도 메르센느 는 그에게 최신의 과학 뉴스를 파리로부터 계속 보내 주었던 것이다. 1618년 르네는 군에 자원 입대하여 장교로서 복무하게 되었는데, 그의 과학적 흥미는 장 교로서 적합한 처지였다. 그리하여 탄도학, 음향학, 투시법, 군사기술, 항해술 등에 많은 관 심을 보였다. 1618년 11월 10일, 르네는 우연히 길에서 어떤 수학 문제의 풀이로 인해 당시 수학자의 지도자였던 베에크만(Isaac Beeckman)을 만나게 되었다. 베에크만은 청년 르네의 뛰어난 수 학적 재능을 즉시 인정하고 그를 칭찬했다. 이로부터 르네는 다시 이론적인 문제에 대한 흥미를 갖게 되었다. 그 해 겨울 동안에 베에크만은 르네에게 낙체(落體)의 가속도에 관한 수학적인 법칙을 찾 아내는 것이 어떤가 하고 제기 했다. 그런데, 이들 두 사람은 이미 갈릴레이가 이 문제를 풀었다는 사실을 전연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갈릴레이의 낙체운동에 관한 해법은 1632년 의 「두 우주 체계에 관한 대화」에 발표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무렵에는 아직 알 까닭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르네는 갈릴레이와는 다른 가정에 바탕을 둔 해법을 몇 가지 구하였다. 그는 그 때까지 수학적 해석과 실험과를 연결하는 방식을 몰랐기 때문에 그 어느 하나를 보아도 낙 체가 실제로 낙하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아무런 서술이 없었다. 르네의 생애 중 이 시기에 대한 이야기는 1905년에 발견된 베에크만의 일기에의해 알려 졌다. 이 시기는 문자 그대로 르네의 자기 발견의 시기였다. 청년 르네의 정신은 극히 다양 한 문제에 대해 믿기 어려울 만큼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4. 해석기하의 발견 1619년 3월 26일, 데카르트는 베에크만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연속량 또는 불연속량으로부터 야기되는 어떠한 종류의 문제라 할지라도 그것을 본래의 성질에 일치하도록 일반적으로 풀 수 있는, 전연 새로운 과학을 발견하였습 니다. 이로써 기하학에 있어서 발견해야 할 일은 거의 아무 것도 남지 않을 것입니 다." 이것이야말로 데카르트 자신이 그 해석기하의 발견을, 혹은 볼테에르(1694~1778)가 말한 바와 같이 「곡선에 대수 방정식을 부여하는 방법」의 발견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이 「새로운 과학」을 1637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출판하였고, 그 때는 그의 논문 「기하학」중에 그 원리의 설명과 몇가지 특수한 응용도 포함시켰다. 또 그 중에는 이 방법의 일반성이 아폴로니우스의 모든 원추곡선을 단 한 종류의 2차 방정식으로 표시 할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원추곡선에는 고대 천문학자의 원, 케플러의 타원, 갈릴레이 가 포물체의 궤도를 서술하기 위하여 사용한 포물선 등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데커르트의 이 최초의 발명이 자연 철학자들에게 강력한 이론을 제공해 주었음은 분명하다. 만일 이것 이 없었다면 뉴우튼 자신이라 할지라도 곤란한 장애에 부딪혀 애를 먹었을 것이다. 해석기하학은 확실히 데카르트의 가장 불후의 업적이며, 이에 의하여 역학 법칙을 대수 방정식의 꼴로 나타내는 방법을 만들어 낸 것이다. 데카르트의 생애를 통해서 한 마디로 그의 이론적 전개 방식을 말한다면, 그는 가장 작은 수의 원리로부터 출발하여 이미 알려 져 있는 모든 사실을 설명하고, 더구나 새로운 사실의 발견으로 이끌어 주는 그런 하나의 체계를 이룩했다는 점이다. 그 이후 오늘날까지의 모든 이론물리학은 이 단일 이론 체계의 이상을 실현하는 것을 유일한 목적으로 삼아 왔다고 할 수 있다. 5. 데카르트의 회심(回心) 베에크만을 알게 된지 1년 후에 데카르트는 유명한 '회심'-아마 그의 생애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극적인 경험-을 겪게 된다. 그는 30년 전쟁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프랑스 군에 속해 있는 바바리아 공(公)의 군 대에 참가하여 다뉴브 강변의 먼 땅에서 겨울 3개월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 해의 11월 10 일 그는 난방이 잘 되어 있는 방 안에 혼자 틀어 박혀서 많은 사색을 거듭하고 있었던 중 그는 두 가지 중요한 결심을 하였다. 그것은 첫째로, 물리학에 대하여 알고 있는 모든 것과 기타 일체의 정리된 지식을 우선 방법적으로 의심하고, 어떤 출발점을 자명한 것으로 놓고 그것에서부터 모든 과학을 다시 금 구축해 보자는 것이었다. 둘째로, 예술이나 건축의 완성이라는 것은 언제나 한 사람의 거장의 손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므로, 이 모든 프로그램도 모두 그 자신이 수행하지 않 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17세기의 데카르트의 전기를 쓴 작가 아드리앙 바이에(Adrien Baillet ; La vie de Monsieur Descartes <1691>)에 의하면 그날 밤 데카르트는 다음과 같은 꿈 세가지를 꾸었다고 한다. 첫번째 꿈에 의하면, 그는 심한 바람이 불고 있는 거리 한 모퉁이에 서 있었다. 그는 오른 쪽 다리가 약하기 때문에 서 있을 수가 없었는데 그 근처에 있는 동료는 아무 일 없이 서 있었다. 이윽고 한 번 눈을 떴으나 다시 잠에 빠져 들어갔다. 그러나, 두번째로 눈을 떴을 때는 뇌성이 들리고 방은 번갯불로 가득 차 있었다. 다시 잠에 빠졌을 때는 꿈 속에서 테 이블 위에 사전이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옆의 다른 책에서는 '나는 어떠한 생활을 보 내야 할 것인가?'라는 글귀가 그의 눈에 들어 왔다. 그와 동시에 낯 선 사람 하나가 그에게 다가와 'Quiet Non'( ; 피타고라스로부터 나온 말로서, 데카르트는 이것을 「인간의 지식과 학문에 있어서의 참과 거짓」으로 해석하였다.)이라는 글귀로 시작되는 몇 개의 시를 보여 주면서 그것을 강권하는 것이었다. 데카르트는 마지막으로 눈을 뜨기에 앞서 이미 이들 꿈의 의미를 생각하고 있었다. 첫 번째 꿈은 그의 과거의 오류에 대한 경고라 생각했다. 두 번째 꿈은 그를 사로잡은 진실의 정신이 내습한다는 것이고, 마지막 꿈은 모든 과학의 가치와 참된 지식에의 길을 여는 것 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 사건은 바이예가 매우 복잡하게 묘사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요 컨데 그것은 참된 지식에의 정당한 접근법에 대하여 데카르트 자신이 확신한 증거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6. 데카르트의 우주론 데카르트는 철학적이고 과학적인 기획의 주된 방향과 그 경과를 차례차례로 써나간 그의 주요한 저서 중에 보이고 있다. 1618년으로부터 1628년에 걸쳐서 휴식없는 군대 생활과 여 행과 방탕 생활을 하는 사이에 그는 참된 과학의 개념과 거기에 도달하기 위한 고도의 합 리주의적인 방법을 만들어 냈다. 이것들을 최초의 역작인 「정신 지도의 규칙」에 서술하 고 있으나, 1628년에 완성되어 있었으면서도 출판된 것은 훨씬 뒤의 일이었다. 이들에 대한 방법론을 전개한 것은 데카르트가 네덜란드로 옮겨 간 다음에 쓰여진 「방 법서설(方法序說)」에서였다. 그 사이, 1628년까지에 데카르트의 탐구는 그 다음 단계에 도 달하고, 제 1원리의 발견에 다다른 것이다. 이것을 그는 1641년에 출판된 「제 1철학에 대한 성찰(省察)」에서 전개해 보였다. 제 1원리로부터 그는 급속히 우주론의 마무리 단계로 향하여 마침내는 1933년에 「우주 론」으로 완성하였다가, 갈릴레이가 유죄판결을 받았다는 보도를 듣고 그 출판을 취소해 버렸다. 데카르트는 이 저작을 모든 운동은 상대적이라고 하는 어느 정도 완화된 코페르니 쿠스적인 견해로 고쳐서 만들고 ㅁ말았는데, 그 개정판이 1644년에 와서야 「철학원리」란 이름으로 비로소 햇빛을 보게 되었다. 7. 데카르트의 와류(渦流)이론 혹성이 어찌하여 그 궤도 상에 있느냐 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데카르트는 저 유명한 와류이론을 추진시켰다. 그 이론에 의하면 에테르의 미소한 입자들이 혹성이나 태양 주위에 거대한 회전흐름, 즉 소용돌이 속에 떠 있는 어린이의 보트와 같이, 이 태양의 소용돌이 속으로 운반되고, 달도 마찬가지로 지구의 주위로 운반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의외라고 생각되는 것은 데카르트 가 그의 물리학의 체계의 이 중요한 부분이라고 하는 것이, 혹성 운동에 관한 케플러의 세 법칙으로 표시되는 사실과 일치하는가를 조사해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데카르트의 이 유명한 와류이론을 분쇄한 것은 뉴튼이었다. 사실 뉴튼이 「수학적 원 리」라는 책 이름을 붙인 것은 데카르트의 「철학원리」에 대한 도전을 표명하기 위한 목 적이었다고 할 수도 있다. 뉴튼은 와류이론을 유체역학에 속하는 문제로 간주하여 그것을 철저히 파괴해 버렸다. 8. 근대 생리학의 아버지 그러나, 데카르트의 역학에서 눈을 생리학으로 눈을 돌리면 그가 아직도 살아 있다는 것 을 알 수가 있다. 그 분야에 있어서는 다른 주제를 취급할 때에 빠져 버린 정성적 전제가 데카르트에 의하여 보다 더 근사한 여러가지 결과를 낳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데카르트가 윌리암, 하베이와 나란히 근대 생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것은 확실하다. 하베이가 실험적 분석의 대가인 데 반하여 데카르트는 전생리학의 기초가 되는 대가적 가설을 도입한 것이 다. 데카르트 자신의 편지에 의하면, 그가 네덜란드에 머무른 긴 기간 동안에 가장 많은 시 간을 들여서 손을 댄 것은 인체의 해부인 것 같다. 기계론적 원리에 의해 그가 설명을 도 입시키려 한 모든 분야 중에서 생물학이 가장 힘든 것이라 생각되었다. 그리고, 정보를 입 수하기 위한 것과 타당한 설명을 선택하는 데는 실험이 가장 필요하다고 느낀 것은 바로 이 생물학 분야였다. 그는 혈액 순환에 관한 하베이의 발견을 받아들이고는 있었으나 심장 의 작용의 기구에 대해서는 하베이와 논쟁을 하게 되었다. 이 논쟁은 데카르트 쪽에 불리 하였으며, 두 사람 다 각각의 설을 입증하기 위하여 중요한 실험에 착수하지 않으면 안 되 게 되었다. 그 결과는 데카르트가 잘못되어 있는 것으로 판명되었으나, 한 가지 본질적인 논점(論點) 만은 정곡을 찌르고 있다. 즉, 심장의 작용의 완전한 설명은 오직 그 것이 고동을 치고 있 다는 사실만 가지고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는 것은 잘못이며, 종국적으로는 모든 물질에 공 통되는 운동에 의하여 설명하도록 해야 된다는 것이다. 오늘에와서 이 애매한 현상에 대한 데카르트의 기계론적인 설명은 오히려 지나치게 소박 하다고 하겠지만, 육체 전체를 일종의 기계로 간주하는 사고 방식 따위는 근대적 생리학에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가설적 모델 방법이 바로 그 것이다. 데카르트의 생리학적 저작 중에는 눈의 깜박임과 같은 자율적인 동작 현상의 멋진 많은 관찰과 약간의 우수한 기계론적 설명이나 보행과 같은 복합 동작에 있어서의 여러 가 지 근육의 운동에 대한 설명이 포함되어 있다. 9. 뉴튼과의 비교 데카르트는 구심적인 사상가로서 평을 받고 있다. 그는 주로 하나의 확고한 중심적 이론 을 출발점으로 하여 거기서부터 밖으로 움직여 나갔는데, 이것은 프란시스 베이컨이나 뉴 튼과 같은 사상가하고는 아주 대조적이다. 프랑스의 작가이자 아마츄어 과학자이기도 한 폰트넬은 뉴튼의 방법과 데카르트의 방법이 얼마나 대조적인가를 다음과 같이 선명하게 묘 사하고 있다. '이처럼 대조적인 두 사람의 위대한 인물은-그러나 동시에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모 두 제 1급의 천재이며, 딴 사람들의 정신을 지배하고, 지성의 왕국을 찾아내도록 숙명적인 운명을 타고 났다.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