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1.01 00:00

G. W. 라이프니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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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 W. 라이프니쯔 1. 법학박사가 수학자로 고트플리이트·빌헬름·라이프니쯔는 1646년 7월 1일 독이의 라이프니찌히 시에서 태어나서 1716 년 11월 4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부친은 괴팅겐 대학의 윤리학 교수였으나 라이프니쯔의가 6세 때 작고했기 때문에 그는 그의 모친에 의 해 양육되었다. 어려서부터 두뉘가 명석했던 라이프니쯔는 거의 독학으로 기초 교육을 끝마쳤는데, 8세 때에는 이미 라틴어를 혼자서 배우고, 곧 이어 그리이스어를 읽게 되었으며, 14세 때에는 아리스토뗄레 스에 열중하였다. 15세 때에 라이프찌히 대학에 입학해서는 법률학을 전공,연구하였지만, 박학다능(博學多能)한 그는 전공인 법학 이외에 수학, 신학, 철학, 자연과학 기타 여러 방면에 흥미를 가졌을 뿐만 아 니라 각 분야에 대하여 그 나름대로의 독특한 견해를 가지고 있어서, 선생도 학우들도 그의 박 식이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고 한다. 그가 17세 되던 해, 라이프찌히 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아 아를호르프 대학의 교수로 초빙 되었다가 얼마 후 연구 도중에 있던 어떤 이유로 인하여 곧 사퇴하였다. 24세 때 공소원(지금의 지방법원)관사가 되었고,마인즈 후작의 의뢰를 받아 법룰의 개량 사업에 종사하기도 하였다. 1672년 그가 26세 되던 해에 그는 마인즈 후작의 명을 받아 파리에 파견되었다가 그 이듬 해 헌 던으로 거너 갔는데, 이 사이에 유명한 많은 과학자듥ㅘ 교유를 가질 기회를 얻음으로써, 법학에 서 방향을 전환하여 과학 연구에 흥미를 갖게 되는 큰 계기가 되었다. 그가 파리에 체재하고 있는 동안 수학의 대가 데카를트,호이겐스 등 많은 학자들과 교제하는 사 이에 그는 후학의 연구에 대단한 매력을 느꼈다. 호이겐스는 네덜한드 태생의 물리학자, 천문학자로서 망원경을 개량하여 토성의 환을 연구하고, 유명한 빛의 파동설에 관한[호이겐스의 원리]를 수립한 대학자이다. 라이프니쯔는 이들 대학자들과 만나는 사이에 자신도 모를게 수학의 영역에 몰입하게 된 것인 다. 따라서, 그가 실제로 수학을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이 시기 이후가 된 셈이다. 그 때 쯤, 호 이겐스는 진자의 진등에 관한 자신의 연구를 정리 한 저서를 라이프니쯔에게 주었던 바 라이프니 쯔는 열심히 이것을 현구하였다 하며, 그 흥미의 중심된 이야기는 고교 수학의 영역을 벗어나므 로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1673년 1월부터 3월까지 런던에 머무르는 동안에 우연히 이 땅의 수학자가 벨과 사귀게 되었는 데. 이 수학자로부터 수학의 연구에 대한 많은 것을 배웠고, 이로부터 수학적인 그의 두뇌는 점 차로 빛을 더욱 발하게 되었다. 그 후 파리로 돌아온 그는 전력을 다 해 체계 있게 수학을 연구 하기로 작정하고 데카르트, 파스칼, 파블리, 빈센트 기하학을 비롯하여 각종 수학서적을 독파하 였다. 그러는 동안 호이겐스는 라이프니쯔의 연구를 꾸준히, 그리고 열심히 지도해 주었다. 라이 프니쯔가 무한급수의 계산에 관한 여러 가지 연구를 하다가 이것을 이용하여 원주율 구하는 새로 운 한 개의 급수를 발명한 것을 호이겐스에게 보였더니, 호이겐스는 아주 기뻐하면서 일층 더 그 를 격려하여 연구를 진행토록 해 주었다. 이처럼 라이프니쯔는 처음부터 수학 전문가로서 체계적으로 수학 교육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취미로 중도에 수학 공부를 시작한 것이다. 2. 수리철학 라이프니즈는 어려서부터 그리이스 시대부터의 철학자들의 형식 체계에 의문을 갖고 있었다. 아 리스토텔레스 철학의 10개의 범주(kategorie)인 본질, 양, 질, 관계, 장소, 시간, 위치, 소유, 동작 및 감정은 몇 세기간 과학적이건 그렇지 않건 모든 사상에 있어서 불가결한 요소이다. 그러나, 17세기 과학혁명이 전진하기 위해서는 유식자의 상상력을 억제하고 있는 이들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소년 시댜애 이들의 범주의 존재를 알게 된 라이프니쯔는, 과연 아 리스토텔레스의 범주가 더욱 세분되든가, 그렇지 않으면 더 큰 대범주로 통합되는가, 아니면 이 세분과 통합 사이에는 `적당한 ㄱ형' 이 있을 수 있는가에 대하여 의문을 갖게 되었다.(결국 이 와 같은 문제는 19세기에 이르러 부울과 벤에 의해 취급하게 되었 다.)--- 부울은 오늘날 `부울 대수'란 이름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라이프니쯔의 수리철학의 논리는 `모든 명제의 술어는 주어에 내재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세계가 `모나드(monad)', 즉 단자(單子)로부터 이루어졌다는 그의 형이상학적 할설과 대응하고 있다. 이 단자라는 것은 자기 충족적인 실체로서, 라이프니쯔의 주장인 예정조화설에 본질적인 듌育?한다. 그는 철학의 최종적 매듭인 「단자론」중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 두 종류의 진리가 있다. 하나는 논증에 의한 진리이며, 또 하나는 사실로서 나타나는 진리이다. 논 증에 있어서의 진리는 필연적인 것이며, 그 반대 명제는 불가능하다. 한편, 사실에 있어서의 진리는(정의에 있어서나 지각에 있어서나) 우연적인 것으로서 그들의 반 대 명제는 가능하다.'라이프니쯔가 말하는 논증적 진리 중에는 모든 수학적 공리, 공준, 정의, 정리가 포함되어 있다. 왜냐 하면 그들을 부정하면 당연히 모순헤 빠지기 때문이다. 3. 보편 기호법 라이프니쯔는 도식이나 기하학적인 도형이나 일반적으로 기호법일지라도 수학적인 사고에 있어 서는 단순한 보조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는데, 이 점에서 그는 이론적으로는 프라톤과 일치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더욱 그들의 도형이나 기호법의 실제적인 역할에서 큰 중요성을 찾아내고 있다. 당 시의 재부분의 수학자와는 달리, 그가 기호법에 대하여 광범한 연구를 하여, 그 과정에서 교유가 있는 주도적 수학자의 대부분, 이를케면 스위스의 베르누이 일족, 영국의 윌리스, 파리스의 크리 스챤 호이겐스 등과 활발히 서로 서신을 교환하였다. 오일러를 예로 든다면, 그는 다른 어떤 수학자보다도 기호나 도식을 도입하는 데 공헌하였고 더 욱 많은 기호를 쓸 것을 추진하였다. 대수적인 식표현의 일부를 정리하는 데에 그 때까지는 오랜 동안 위에를 긋는 일이 행해지고 있었으나, 이것을 괄호를 바꿀 것을 제안한 사람이 오일러이다. 또, 그는 곱셈의 'X'대신에 ` . '를 제안하고(아 성안드류스의 십자는, 문자 X와 혼동되기 일쑤 이다), 더욱 소수점, 등호, 나눗셈과 비의 기호 ` : '등을 제의하였다. 대수에 있어서 거듭제곱 을 나타내는 데 오직 문자를 되풀이 하여 쓰는 대신에 오른쪽 어깨에 그 갯수를 쓰는 지수기호를 도입한 사람도 그였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미적분법의 기호의 대부분은 라이프니쯔가 만든 것이다. 적분이라는 셈법은 아르키메데스 시대부터 서서히 발전해 온 것인데 그는 ≪합계≫를 의미하는 머리글자 S를 아래위로 잡아당겨 특징적인 기호 ∫를 만들어냈다. 그의 이 방면에서의 개혁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실례는, 미분기호 d일 것이다. 라이프니쯔와는 독자적으로 미적분학을 발명하고 있었던 뉴우튼은, 이른바 `유량'에 대한 `유율 '을 나타내는 데 문자위에 검은 점을 치거나, 오른쪽 어깨에 대시를 치거나 했으나 그것들을 인 쇄하기도 어렵고 더구나 읽기도 쉽지 않았다. 영국의 수학자들이 이 뉴우튼의 불편하기 짝이 없는 기호를 고수한 데 비해, 대륙의 동업자들은 라이프니쯔의 보다 더 표현적인 합리적 기호 체계를 구사하여 자꾸만 신분야의 개척으로 향해 나 아갔다. 이 때문에 영국에 있어서의 해석학의 발달이 19세기에 이를 때까지 늦어버렸다는 것은 널리 알 려진 사실이다. 라이프니쯔는 기호의 형태로써 그 내용을 충실히 반영시킬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는 "사람은 기호를 씀으로써 발견을 하는데 편의를 얻게 되며, 이 편의는 그 기호가 사물의 본성을 간명하고 충실하게 표현하고 있을 때, 이를테면 사실 그대로를 묘사하고 있을 때에 최대가 된 다. 그리고 실제, 그 경우에 있어서 사고의 노력은 놀랄만큼 경감된다." 라고 쓰고 있다. 4. 미적분법의 발견 라이프니쯔가 외교에 있어서 평화적인 조정자였다고 하면, 물리학·수학·철학에 있어서는 그것 과 대조적으로, 전투적인 당파인이었다. 서한이나 출판을 통하여 그는 주로 영국의 학자들과 심 한 논쟁을 벌였다. 모든 것은 그와 뉴우튼이 미적분법 발견의 우선권에 대해서의 격렬한 투쟁에 말려들었을 때에 시작됐다. 어느쪽도 아주 공평하게 행동했다고는 말할수 없었으며, 양쪽 다 필 요 이상으로 상대방의 공헌을 무시하려고 하였다. 오늘날에는 그들이 미적분학을 각각 독자적으로 발견했다는 것은 아주 변화를 최급하기 위한 유 율법에 대하여 이미 1665년에 썼고, 다음 10년 간도 계속 쓰고 있었는데, 이 문제에 대하여 공표 한 것은 겨우 1687년의 일이었고, 그것은 라이프니쯔가 「학술보고」에 「최대·최소 및 점선에 대한 새로운 방법과 그에 관한 이상한 형의 셈법」이라는 짧은 수수께끼 같은 시론을 발표한 3년 뒤의 일이었다. 라이프니쯔는 조합 해석의 방법으로 미적분법에 이르렀다(그가「논증의 모든 진리를 계산의 일 종으로 되게 만드는 일반적 방법」을 처음으로 제기한 것은 20세의 젊음으로 쓴 그의「조합술」 에서였다). 당초 그가 무엇보다도 흥미를 갖게 된 것은 논리적, 신비적인 사항이었으며, 구가 수학에로 전 환한지 얼마 안 되어 미적분학의 기본원리, 즉 극한과 변화율을 연구하는 수단인 미분법은 적분 법의 역산(逆算)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라이프니쯔도 뉴우튼도, 미적분학의 엄밀한 기초를 확립해 두지는 모했지만 그들 둘 다 고대의 수학자들의 앞을 가로막는 제 1의 장애는 넘어선 것이다. 그 장애라는 것은 참의 실제는 불변한 본질을 갖기 때문에 변화의 과학적 취급은 불가능이라고 하는 플라톤에 의하여 고취된 신앙을 말 한다. 5. 만능의 용달사 라이프니쯔의 필생의 문제는 보편언어와 논리대수에 관한 연구였었다. 그는 미적분학을 그 기본 적 기호와 함께 완성하여 기호 논리에의 길을 열어 주었다. 라이프니쯔는 오늘날의 공학의 두 수학적 기초인 통신이론과 제어이론의 수호자라고도 할 수 있 다. 왜냐 하면, 그의 사상이 보편기호법과 논리계산이라는 두 개의 밀접하게 관련된 개념에 집중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여기서부터 현대의 수학적 기호와 기호논리가 발생하게 된 것이 다. 수학적 `보편언어'에 대한 라이프니쯔의 불타는 듯한 정영이었는데, 이 같은 정열이야말로 그의 다채로운 경력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는 정치학자, 외교관으로서, 혹은 여려 가지 기계 장치의 발명가로서, 혹은 득일 하노버 가 (家)의 가계보 작성자로서 각각의 시기에 또는 동시에 그 역할을 다해 왔던 것이다. 더욱이 그는 17세기 사상의 얽힌 모든실을 하나의 정리된 체계로 연결시키려고 노력하였고, 수 학·물리학·형이상학·심리학·신학 등을 결합하는 데 많은 노력을 했다. 그러나, 이 노력은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그의 생애는 통일된 계통적인 사상에 의해서보다도 오히려 그 엄청난 창조력과 위에 열거한 여러 학문의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발전에 영향을 주 지 각(知覺)에 대해 더 흥미를 느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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