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1.01 00:00

수학에 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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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아는 것 들입니다. 읽다 지치지 마시길 보람이는 게으름을 피우며 미루고 있던 책상 정리를 하면서 어떤 문제집이 찢겨져 나왔는지 알 수 없는 종이 조각 하나를 주워 들었다. 그런데 거기에는 조금 이상한 내용의 문제가 적혀 있었다. 우리가 흔히 쓰는 고무줄을 이용하여 삼각형, 사각형, 별모양, 달팽이 모양을 만들어 놓고 연결상태가 다른 하나를 고르라는 문제였다. 보람이는 과연 이 종이 조각이 어느 문제집에서 찢겨져 나온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만약 보람이가 수업시간에 '도형의 관찰'이라는 단원을 배웠다면 이 문제가 수학문제라는 것쯤은 쉽게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다면 잠시나마 혼란스러웠을 것임이 틀림없다. 우리는 자신이 가진 수학 지식의 깊이에 따라 '수학이라는 학문은 어떤 것이다.' 라는 생각에도 조금씩 변화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처음에는 수를 더하고 빼는 것을 수학이라고 생각하다가 문자를 익히고 식의 계산에 익숙해져 수학의 추상성에 익숙해지면서 좀 더 넓은 의미의 수학을 생각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고무줄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기하학적 도형의 길이나 넓이, 부피를 계산하는 것을 수학이라고 생각하던 것에서 이제 그 도형이 놓인 순서나 위치만을 따지는 것도 수학의 내용에 포함시켜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곧 고무줄을 만드는 원의 넓이나 삼각형의 둘레에 대한 관심뿐만 아니라 원이나 삼각형이 달팽이 모양으로 꼬인 곡선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에 대한 관심도 수학의 내용이라는 것이다. 재미있기는 하나 한편으로는 단순하기도 하여 이런 것도 수학인가 하고 의아해 할 수도 있으나 기하학적 도형에 대한 사람들의 이러한 관심은 '위치의 기하학' 이라는 이름으로 기하학의 한 독특한 부분으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A4용지의 탄생 복사용지를 포함해 공문서 등에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는 종이가 바로 A4 용지다. A4 용지의 규격은 297mm×210mm이다. 단순하게 300mm×200mm로 정하면 훨씬 편했을 텐데 왜 이렇게 복잡한 수치가 쓰였을까. 게다가 A4 용지는 우리 눈에 가장 아름답게 보인다는 황금비를 이루지도 않는다. 황금비는 (1 +) / 2≒1.618인 반면, A4 용지의 폭에 대한 길이의 비는 약 1.414이다. 종이의 경제학 일상 생활에서 사용되는 종이는 제지소에서 만든 큰 규격의 전지를 절반으로 자르고 또다시 절반으로 자르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만들어진다. 그런데 이렇게 절반으로 자르다 보면, 원래의 규격과 다른 모양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300mm×200mm와 같이 폭에 대한 길이의 비가 1.5인 종이를 절반으로 자르면, 200mm×150mm 크기로 만들어지고 이때의 비는 1.333(4/3)이다. 1.333의 비를 가진 직사각형은 1.5의 비를 가진 처음 종이에 비해 뭉툭해 보인다. 이런 종이를 실생활에 필요한 용도로 이용하기 위해서는 일부를 잘라내어 보기 좋은 형태로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아까운 종이와 펄프를 낭비하게 된다. 독일공업규격 위원회(Deutsche Industrie Normen)는 큰 종이를 잘라서 작은 종이를 만드는 과정에서 종이의 낭비를 최소로 줄일 수 있는 종이의 형태와 크기를 제안했다. 적절한 규격을 선택했을 때, 타자지의 절반을 그대로 편지지로 사용하고 편지지의 절반을 그대로 메모지로 사용한다면 종이를 많이 절약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이렇게 해서 등장한 것이 A4 용지다. 문제는 닮은꼴 절반으로 자르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종이를 그대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전지의 규격이 보기 좋아야 하고, 이를 절반으로 자르고 또다시 절반으로 자른 작은 종이들이 전지의 규격과 같으면 바람직하다. 수학적으로 말하면 서로 닮은꼴이어야 한다는 얘기다. 전지의 길이 대 폭의 비를 x : 1이라고 하자. 그러면 이것을 절반으로 자른 종이의 길이 대 폭의 비는 1 : x/2 이다. 두 직사각형이 서로 닮은꼴이므로 비례식 x : 1 = 1 : x/2 가 성립하고, 이로부터 이차 방정식 를 얻는다. 그래서 이다. 이렇게 전지의 폭에 대한 길이의 비를 로 택하면, 반으로 자르는 과정에서 이 비가 항상 유지된다. 1 : 는 황금비는 아니지만 눈으로 보아서 그렇게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이렇게 도형의 닮은꼴, 비례식, 이차 방정식, 무리수 등의 수학적 개념이 실생활에 유용한 종이의 재단에 이용된다. A4와 B4의 차이 앞에서 A4 용지의 폭에 대한 길이의 비는 약 1.414였다. 눈치챘겠지만, 이 값은 실제로 를 가리킨다. 단지 제조 과정에서 편의를 위해 근사값을 택했을 뿐이다. 그런데 왜 297mm×210mm일까. A4 용지의 전지를 A0 라고 하는데, A0 의 규격은1189mm×841mm이다. 더 복잡한 수치다. 그런데 A0 용지의 넓이를 계산해보면 999949mm ² 임을 알 수 있다. 이는 1000000mm ² , 즉 1m² 의 근사값이다. A0 는 폭에 대한 길이의 비가 이고 넓이는 1m ² 가 되도록 만든 종이이다. 이를 절반으로 자르는 과정에서 A1, A2, A3, A4 등의 ‘에이(A)판’ 용지가 만들어진다. B4와 B5 용지도 많이 사용된다. 이런 종이도 A판과 같은 원리로 만들어진다. 전지 B0의 폭에 대한 길이의 비는 이고 넓이는 1.5 가 되도록 규격을 1456mm×1030mm로 정했다. 이를 절반으로 자르는 과정에서 B1, B2, B3, B4, B5 등의 ‘비(B)판’이 만들어진다. A판과 B판의 모든 용지가 서로 닮은꼴(A0와 B0의 닮음비는 )이기 때문에, 적절한 비율로 확대하거나 축소해서 다른 용지에 복사할 수 있는 또다른 이점이 있다. 수학의 미란다 법칙 대부분의 학생들은 중학교 2학년 도형의 성질이라는 대단원에 들어서게 되면 이전과는 다른 학습부담을 느끼게 된다. 내심 수학에 자신있어 하는 학생들도 진지하게 상담을 해오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는 그 단 적인 증거라 할 수 있겠다. '이등변삼각형의 두 밑각의 크기는 같다.'라는 것을 증명하고 난 바로 다음 '두 내각의 크기가 같은 삼각형은 이등변삼각형이다.'를 증명하여야 하니 학생들은 당연해 보이는 것을 왜 또 증명하여야 하는가 하고 답답하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답답함을 느끼는 사람은 비단 학생들뿐이 아닌 것 같다. 빨간 불이 켜져 있는 신호등을 무시하고 달려오는 차를 붙잡은 교통경찰관도 마찬가지인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교 통법규를 눈앞에서 위반해 놓고도 잘 달리는 차를 왜 세우느냐고 따지는 운전자에게 뭘 잘못했는지는 자신이 더 잘 알지 않느냐는 식으로 상대방을 무시한 채 딱지를 발급할 수는 없다. 법을 어긴 사람에게 벌을 줄 때 그 사람이 무엇 때문에 벌을 받아야 하는지 모르는 경우 그 이유를 확실히 알게 하고, 또는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쓰는 일이 없도록 그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는 변명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법의 정신이 만들어낸 '미란다 원칙' 때문이다. 여러분들도 외국영화에서 범인과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 끝에 범인을 잡은 형사들이 그 뻔한 죄인에게 자신의 죄명을 말로써 확인하는 장면을 한 번쯤은 보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당연한 것을 주먹을 휘두르거나 윽박지르지 않고 왜 그런 결론이 나오게 되었는지를 차근차근히 밝히는 서구인들의 습관은 어디에서부터 비롯된 것일까? 그들의 이러한 태도는 수학에서의 증명법과도 무관하지 않은데 이러한 습관이 법의 정신에 반영된 결과가 '미란다 원칙'이라면 수학의 정신에 반영된 결과는 유클리드 기하학이 따르고 있는 '증명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속 이야기 영화 '쥬라기 공원'을 재미있게 본 사람들은 많겠지만, 그 영화에 수학자가 한 사람 나왔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까만 안경을 쓰고, 키가 큰 사람이었는데, 영화 중간에 부상(!)을 입는 바람에 공룡을 물리치거나, 꼬마 친구들을 보호하는데는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한 인물이었다. 쥬라기 공원에 왜 수학자가 등장했을까? 그는 인위적으로 조성된 살아있는 고대 공룡 공원에 대한 평가를 위촉받은 소위 '전문가' 중의 한 사람이었다. 다른 전문가(주인공)들이 고대 동·식물학자였던 점에 비추어 보면, '글쎄, 수학자가 왜 공룡 공원에 대한 전문가가 되는거지?' 하고 충분히 생각해 볼 만 하다. 그가 영화 속에서 맡은 역할을 살펴보자. 헬리콥터를 타고 공원에 조성된 섬으로 들어가는 영화의 첫 부분에서 그 수학자가 주인공 여자-고대 식물학자에게 묻는 질문은 "혼돈이론을 아십니까?" 였다. 그는 영화 진행 과정에서 이 이론을 기반으로 계속 공룡 공원의 미래에 대하여 부정적인 의견을 내어 놓았고, 마치 그의 이론이 맞아 떨어지는 것처럼 공원에서는 엄청난 불상사가 발생하였다. 예로부터 과학자들은 모든 자연 현상을 관찰하며 그것을 식으로 나타내어 앞으로의 모습에 대해 예측할 수 있기를 갈망해 왔다. 그런 바램은 실험실 안에서의 여러 단순화된 상황에 대해서는 상당히 성공하였지만, 자연 그대로의 현상에 대해서는 실패하기 일쑤였다. 대기, 복잡한 해류, 야생동물들의 수와 변동, 심장과 뇌의 진동 등 불규칙적이고 변덕스러운 현상도 예측할 수 있고 식으로 나타낼 수 있음을 밝혀낸 것이 바로 혼돈(chaos)이론이다. chaos현상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그 현상의 무질서함이 '창조'의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때로는 안정되고 때로는 불안정한, 때로는 유한하고 때로는 무한한, 하지만 언제나 살아있는 매력을 지닌, 어느 것도 똑같지 않고 복잡한 형태를 만들어 내는 것이 자연 현상이다. 그러나 그런 현상 중에는 부분적으로는 복잡하지만 전체적인 모습은 안정적인 현상들이 의외로 많다. 예를 들어 기상 상태가 극도로 불안정할 때 곧잘 나타나는 번개의 모습에서 어느 가지의 모습도 똑같지는 않지만, 그 부분적인 모습과 전체적인 모습이 상당히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듯 chaos이론은 겉으로는 무질서하게 보이는 현상에도 내적으로는 놀라운 규칙성이 있음을 밝혀낸 이론이다. 혼돈이론은 지난 30년간 서구 과학계에 엄청난 변화를 일으켰으며, 현재 자연 과학 분야는 물론 정치학, 경제학, 공학, 의학, 예술 등에 폭넓게 이용되고 있다. 쥬라기 공원에 혼돈이론으로 무장한 (?) 수학자가 나타난 것도 이 이론을 인정하는 미국사회의 존경심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건망증과 집중력의 차이-뉴턴 친구 몇 몇을 초대하여 저녁을 대접하던 뉴턴은 포도주 한 병을 가지러 방에서 나갔다가 딴 생각에 사로잡혔다. 늘 그렇듯이 한 번 생각에 빠지기 시작하면 다른 모든 것은 잊어버리게 된다. 뉴턴은 옷을 걸쳐 입고 교회로 가버렸다. 전해지는 이야기가 또 있다. 친구인 스턱켈리 박사가 저녁을 같이 먹기로 하여 뉴턴을 찾아왔더니 식탁에는 이미 요리된 닭이 있는데 뉴턴은 외출 중이었다. 저녁 약속을 잊어버린 뉴턴은 몹시 늦게 들어왔고, 기다리던 스턱켈리 박사는 마침내 닭을 먹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나중에 들어온 뉴턴은 식탁에 앉아 그릇의 뚜겅을 열었다. 뼈만 남은 그릇을 본 뉴턴은 "아 참, 우리가 이미 저녁을 먹었군."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평범한 사람이 이런 일을 벌이게 되면 건망증이 심하다는 평을 듣고 끝나는 일이지만 뉴턴의 경우에는 다르다. 그는 건망증이 심하다기 보다는 집중력이 강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한 번 생각에 빠지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 다른 것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우리 주위에도 한 가지일만 잘하는 사람을 종종 볼 수 있다. 보통 때는 없는 듯이 있다가 특별한 때가 오면, 예를 들어 춤을 출 때라든가, 수학 경시대회 때라든가, 영화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라든가, 눈에서 빛이 나면서 적극적으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이 있다. 뉴턴도 바로 그런 사람이었던 것이다. 수학, 과학에 대한 생각을 시작하면 다른 것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그런 집중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의 이런 집중력이 바로 그의 위대한 업적의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그가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을 발견했다는 이야기는 아마도 이렇게 다른 사람은 그냥 지나쳐 버리는 어떤 현상의 의미를 집중적으로 파고들어 과학적으로 분석해내는 능력을 빗대어 생긴 이야기일 것이다. 뉴턴은 그 시대의 수학자들 사이에 알려진 다양한 어려운 문제 중 어느 것도 풀지 못한 것이 없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와 비숫한 시기에 살았던 라이프니쯔는 "인류 역사상 뉴턴이 살았던 시대까지의 수학을 놓고 볼 때, 그가 이룩한 업적이 반 이상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그가 수학에 관하여 이룬 업적은 엄청난데 고등학교에 가야 그 내용을 맛볼 수 있는 것은 매우 애석한 일이다 아라비아인들이 보존한 인류의 재산 인류가 세계 문화의 많은 부분을 보존해오는 데 있어서 상당히 중요했던 것은 아라비아인들이 그리스와 인도의 해박한 지식을 잘 보존하고 발전시켰다는 데 있다. 아랍권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근대 서양 과학이 이슬람 과학 위에서 싹텄다면 어리둥절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과학 용어의 어원을 따져보면 이슬람 문화가 서양에 끼친 영향이 쉽게 눈에 띈다. 많은 별 이름이, 특히 희미한 별 이름은 대부분 아라비아어이고 알칼리, 알코올 등 자연과학에 등장하는 용어들 중 많은 것이 아랍어에 기원을 두고 있다. '대수(代數, algebra)'라는 말도 그 주제에 관한 알-화리즈미의 논문 < al-jabr>으로부터 유래되었다. 이 제목은 그대로 번역할 때, '재결합과 대립의 과학' 또는 '이항과 소거의 과학'이 된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이 책은 유럽에 라틴어 번역 본으로 알려지면서 'al-jabr' 또는 'algebra'가 만들어진 것이다. 또, 1857년에 라틴어 번역 본으로 발견된 알-화리즈미의 책은 "알고리트미(algoritmi)가 말하기를, ..."로 시작되고 있다. 여기서 '알-화리즈미'의 이름이 '알고리트미'로 변하였고, 그것은 현재 어떤 특별한 방법으로 계산하는 기술을 의미하는 '알고리즘(algorithm)'이 되었다. 그러면 이슬람에서 학문이 융성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마호메트가 창시한 이슬람교의 영향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지식의 탐구는 천국에 이르는 길'이라고 가르치면서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지식을 갈구할 것을 유언했다. 마호메트의 이런 소망이 이후 아랍인들에게 지식을 구하기 위해서는 동방으로의 탐험도 마다하지 않는 모험심과 열정을 불어넣은 것으로 보인다. 바그다드의 회교왕들은 학문의 후원자가 되어 뛰어난 학자들을 궁정으로 초대했었다. 그리하여 천문학, 의학, 수학 등에 관한 인도와 중국, 그리스의 많은 저작들이 부지런히 아라비아어로 번역되었으며 그 덕분에 후에 유럽 학자들이 그것을 라틴어 및 그 밖의 다른 언어로 번역할 수 있었다. 아라비아 학자들의 작품이 없었다면 암흑의 중세 시대를 거치는 오랜 동안 많은 과학 유산이 돌이킬 수 없이 잊혀져 버리고 유럽 근대 문명이 꽃피우는 것은 어려웠을 지도 모른다. 알-만수르 왕의 통치기간 중에 브라마굽타의 저작들이 바그다드(약 776년)에 전해졌고 아라비아어로 번역되었다. 이것이 바로 인도 숫자가 아라비아 수학에 전해진 계기였다고 전해진다.「아라비안 나이트」의 이야기로 잘 알려진 왕인 하룬 알-라시드의 아들인 알-마문의 통치 기간(809년 ~833년) 중에 살았던 가장 유명한 수학자인 알-화리즈미(al-)는 대수에 관한 논문과 인도 숫자에 관한 책을 썼는데, 그 두 가지 다 12세기에 라틴어로 번역되었을 때, 유럽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페르시아, 메소포타미아, 북아프리카, 스페인에까지 영토를 확장했던 이슬람제국은 이후 쇠퇴기에 접어들게 된다. 터키족의 침입, 십자군과의 전쟁 등을 겪고 몽고족의 강력한 침략을 당하여 위축된 이슬람 제국은 결국 1492년 스페인에 전복되고 말았다. 서양 과학이 발달하기 시작하는 12, 13세기에 유럽 학자들은 그리스와 아랍의 과학 문헌들을 라틴어로 옮기는 작업을 대대적으로 펼쳤다. 과학사에서 '번역의 시기'라고 불리는 이 시대에 거의 대부분의 과학책들과 철학책들이 번역된 것이다. 이로써 유럽인들은 5세기에서 10세기에 걸쳤던 과학의 암흑기를 벗어남과 동시에 자신들의 연구 업적을 축적해나갈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아라비아인들이 중세의 암흑시대에 세계의 많은 지적 재산을 관리하여 후대의 유럽인들에게 넘겨주지 않았더라면 17세기의 과학혁명이 가능하지 않았으리라고 장담하는 역사가들도 많다. 이슬람의 유산은 과학혁명기의 위대한 과학자들이 어떤 문제에 부딪쳤을 때 어떤 방식으로 풀어 나가야 할지에 대한 지침을 주었던 것이다. 데카르트 1 : 좌표를 발견하다. 눈뜨기 힘든 아침 시간, 같은 또래의 보통 소년들과는 달리 제 좋을 때까지 침대에 누워 휴식을 취해도 좋다는 허락을 교장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한 소년이 있었다. 그가 바로 17세기 근대 수학의 기수, 데카르트 였다. 근대 과학의 성립을 사상적으로 뒷받침한 철학자이기도 한 그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로 우리에게 더욱더 잘 알려져 있다. 어려서부터 허약하였던 그는 자신의 학교 생활을 뒤돌아보면서 침대에서 보낸 조용한 아침의 명상이 자신의 철학과 수학의 참다운 원천이었다고 얘기한다. 그 예에 해당하는 일화가 있다. 그가 처음으로 도입한 좌표 개념의 발견과 관련된 일화인데, 침대에 누워 천장에 붙어있는 파리를 보고 파리의 위치를 나타내는 일반적인 방법을 찾으려고 애쓰다가 '좌표'라는 발상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중학교 1학년 함수 단원을 공부하면서 모눈종이 위에 (1, 2), (-2, 3)와 같이 좌표를 이용하여 점을 찍어 본 학생은 너무도 당연하고 상식적인 좌표의 사용이 뭐 그리 대단한가 하고 의아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일화에서 유심히 보아야 할 것은 천장에 붙어 있는 것이 얼룩과 같이 고정된 것이 아닌 움직이는 물체, 즉 파리라는 것이다. 파리가 움직이면 x의 값이 변하면서 y의 값이 따라서 변화한다. 만약 파리가 x축, y축이 만든 직각의 이등분선을 그리며 움직이면 이 직선은 ''라는 식으로 간단히 나타낼 수가 있는 것이다. 직선뿐만 아니라 원, 타원, 쌍곡선과 같은 기하학적 도형도 모두 식으로 나타낼 수 있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수의 성질을 연구하는 대수학과 도형의 성질을 연구하는 기하학을 하나로 묶어 연구한 데카르트의 수학하는 방법(이를 '해석기하학'이라 한다.)의 발견을 귀띔해 주는 일화인 것이다. 수학의 도구, 기호는 누가 만들었을까? 고대 그리스에서 디오판토스가 기호를 사용한 이후, 인도에서도 비슷한 기호를 사용하였으나 본격적인 기호의 사용은 16세기 초 유럽에서 대수학이 발달하면서 이루어졌다. 산업이 발달하면 점점 더 성능이 좋은 기계가 나오게 되고 그것들로 인해 더 좋은 물건을 생산하듯이 수학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중세 암흑기를 빠져 나오면서 수학이 발달하게 되자 수학자들은 의미있고 편리한 도구가 없는 것에 대해서 불편함을 느끼게 된 것이다. 그런 이유로 16세기초부터 기호들이 엄청나게 만들어졌다. 또 그것은 강력한 도구가 되어 이 시기에 계산이 발달하고, 이차.삼차 방정식의 풀이 방법을 개발해내는 밑거름이 되기도 한 것이다. 이제 대수학에 쓰이는 기호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살펴보자. 이탈리아의 수학자 파치올리(Pacioli, 1445?-1509?)는 1494년 출판한 책 「산술 요약」이라는 책에서 덧셈을 p('더 많은'을 뜻하는 piu로부터), 뺄셈은 m('더 적은'을 뜻하는 memo로부터), 미지수를 co('물건'을 뜻하는 cosa로부터) 등으로 나타내었다. 또, 오트레드(Oughtred, 1574-1660)는 수학적 기호를 대단히 강조하면서 150개가 넘는 수학 기호를 도입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어떤 뜻을 지니는 기호가 발표된다고 해서 즉시 모든 사람이 그 기호를 쓰게 되는 것은 아니다. 많은 물건이 만들어져서 시장에 나와 있어도 사람들은 그 중에서 자신에게 쓸모있는 것만을 사서 사용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수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기호 중에 사용하기 편리한 기호, 그 의미가 한 눈에 드러나는 잘 만들어진 기호들이 살아남아 모든 사람들이 수학을 배울 때나 연구할 때 사용되는 것이다. 실제로 오트레드가 만든 기호 중에서 현재까지 살아 남은 것은 곱셈 기호 × 등 단 3개 뿐이다. 그러면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기호들은 언제 누가 만들은 것일까? 덧셈 기호와 뺄셈 기호는 1489년에 비트만(Widman)이 쓴 산술책에 처음으로 나타나 있다. 덧셈 기호 +는 더한다는 뜻의 라틴어 et를 줄여서 얻었고, 뺄셈 기호 -는 뺀다는 뜻의 minus를 간단히 쓴 m를 사용하다가 -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책에서 이 기호들은 더하고 빼는 기호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단순한 과잉과 부족을 뜻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1514년 네덜란드의 수학자 호이케(Hoecke)에 의해서 덧셈, 뺄셈의 기호로 쓰여지게 되었다. 등호(=)는 레코드(Recorde, 1510?-1558)가 그의 책 「지혜의 숫돌」에서 사용하였다. 그는 같다는 기호로 길이가 같은 두 평행한 선분을 택한 이유를 "왜냐하면 어떠한 두 개도 이것보다 더 같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다. 또, 제곱근 기호(√ )는 1525년에 루돌프(Rudolff)에 의해서 도입되었다. 이는 근을 뜻하는 radix의 첫 자에서 따왔다고 한다. 이와같은 기호들은 그 의미도 쉽게 이해되고 쓰기도 편리하여 금방 널리 퍼지게 된 것들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기호 중에는 도중에 바뀐 것들도 있다. 16세기 프랑스의 비에트(Viete, 1540 - 1603)는 미지의 양을 표현하는 데 알파벳의 모음(a, e, i, o, u)를 사용하였고, 이미 알고 있는 양을 표현하는 데는 알파벳의 자음을 사용하였다. 또, A, Aq, Ac와 같이 한 글자 A로 거듭제곱들을 모두 나타내었다. 그럼으로써 기호를 여러 개 기억해야 하는 번거로움도 피하게 되었고, 더 많은 지수의 거듭제곱을 쓰는 일도 가능하게 되었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변화였다. 그러나 비에트의 이러한 표현은 그후 데카르트(Descartes, 1596-1650)에 의하여 손질받게 된다. 데카르트는 미지의 양을 표현하는 데는 알카벳 마지막 글자들 x, y, z, 이미 알고 있는 양을 표현하는 데는 알파벳 처음 글자들 a, b, c 등으로 쓰는 전통을 세웠다. 또, 제곱, 세제곱 등의 거듭제곱을 x ², x ³ ,...와 같이 밑과 지수를 이용하여 나타내었다. 그의 기호들은 그 뜻의 명확함과 사용상의 편리함 때문에 이전의 비에트의 기호를 제치고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수학의 노벨상 = 필즈상 1.노벨상에는 물리학상, 화학상, 의학상 등은 있지만 수학상은 없다. 이유인 즉 노벨 시대의 수학자들 가운데 노벨과 애인사이였던 저명한 수학자가 있었는데, 노벨이 그녀에게 버림을 받아 수학상이 제정될 경우 그녀에게 영예를 안겨주어야 하는 결과가 초래되므로 수학상을 마련하지 않았다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그 진위 여부는 알 수 없다. 1924년 캐나다 토론토 국제 수학자 회의(International Congress of Mathematicians)의 잉여금을 바탕으로 필드상이 창설되었다. 필드상은 노벨상보다 기준이 더욱 엄격하다. 그 중 하나는 수상자의 수상시 연령이 40세 미만이어야 한다는 규정이다. 중요한 논문은 30대에 발표해서 40대에 인정을 받았다면 그 사람은 실격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나라 사람 가운데 필드상을 받은 사람이 있을까? 유감스럽게 한 사람도 없다. 그리고 필드상은 '40세 미만' 이라는 규정 외에 '4년마다 한 번'이라는 제약이 있다. 예를 들어 38세 때 수상을 놓치면 그 직후에 아무리 우수한 논문을 썼다 하더라도 수상할 수 있는 자격이 상실된다. '4년마다 한 번'이라는 뜻에서 생각한다면 '수학의 노벨상'이라기보다 '수학의 올림픽'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합당하지 않을까? 2. Alfred B. Nobel (1833-1896)은 스웨덴의 화학자이자 발명가였는데, 그는 많은 재산을 희사하여 물리, 화학, 문학 등의 5개 부분에 대하여 매년 세계에서 가장 훌륭하고 두드러진 업적을 남긴 사람들에게 상을 주도록 하였다. 모든 학문의 기초가 되고, 특히 자연과학의 모체가 되는 수학 분야에 대하여는 노벨상이 제정되어 있지 않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Novel과 같은 시대에 유명한 해석학자 Mittag Leffler가 수학계에 태두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Leffler와는 사이가 매우 좋지 못하였던 모양이다. 이러한 이유로 Novel은 Leffler와 관계된 수학 부문만은 노벨상의 대상에서 제외하고 말았다고 한다. 한편, 캐나다의 수학자 John Charles Field (1863.5.15-1932)는 Toronto대학에서 수학교수로 일생을 마감하였는데, Field는 수학분야에도 이에 상당하는 상을 재정 하겠다는 것이 그의 염원이었다. 그는 1880년에 17세로 Toronto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의 Johns Hoppins대학의 대학원에서도 수학을 전공하였다. 그는 처음 5년간은 파리에서 연구를 하고, 다음에는 독일의 Gotingen대학에서 공부하였는데, 당시의 공책을 살펴보면 일류 수학자인 Pucks, Frobenius, Hensel, Schwarz, Weieerstrass 등의 강의를 듣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Field의 10년간의 유럽 생활은 극히 검소한 생활로서 아르바이트를 하여 생활을 유지하면서 절약과 근면을 생활의 신조로 삼고, 일생 동안 담배도 피우지 않고 독신으로 청교도적 생활을 계속한 훌륭한 사람이다. 이와 같은 표현을 하고 보면 그는 완고하고 딱딱한 인간으로서 사교성도 없고 남과 잘 접촉 안 하는 편협한 인간같이 생각되나, 사실은 그와는 정반대의 성격의 소유자였다. 자기자신의 일상생활을 위해서 말하는 바와 같이 검소하고 근면하였지만 이러 한 자신의 생활습관을 타인에까지 강요하는 그런 일은 절대로 하지 않고 남에게 대할 때는 항상 유머러스하고 너그럽고 원만한 인품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일상생활은 검소할 망정 그는 스포츠를 즐기고 음악에도 많은 취미를 가지고 이를 감상하는 동시에 스스로 바이올린도 연주하는 음악 애호가이기도 했다. Field교수는 고국에 돌아와 30 여년간 모교인 토론토 대학에서 연구하면서 국내외적으로 눈부신 활동을 했다. 특히 제 7회 국제수학자 대회가 토론토에서 개최되었을 때, 제 일차 세계대전(1914-1918)의 패전국인 독일의 수학자를 제거하려는 국제수학 연합파와 독일 동정파의 수학자들 사이에 갈등이 심화되었을 때, 수학자들 상호간의 갈등을 해소하고 이 회의를 무난하게 수행해 나간 사람이 바로 Field교수였다. 1928년에는 bologna에서 제 8회 국제 수학자 회의가 열렸다. 교수는 7회 회의에서 회의비, 출판비를 결산한 상당한 금액이 남아 있었으므로 이를 기금으로 하여 수학 분야에 노벨상에 해당하는 상을 제정하기 위하여 자금 조달과 세계수학자의 단합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1932년 제 9회 국제 수학자 회의가 스위스의 쥬리히에서 열릴 때, 그의 제자들이 정식으로 제안하여 만장일치로 채택되었으나 Field교수는 과로로 회의 수 주 전에 죽었으며, 필드는 자기의 전 재산을 이 상의 기금으로 희사하였다. 노벨상은 매년 수상하지만 Field상은 4년에 한번씩 수여되기 때문에 노벨상보다 4배의 가치가 있으며, 노벨상에는 연령의 제한이 없지만 이 상은 40세 미만인 수학자만이 자격이 있기 때문에 노벨상보다 우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첫 번째 Field 메달은 1936년(제 10회) V.Athfors 교수(핀란드), J.Douglas 교수(미국)이었다. Field medallist들 중에는 동양에서는 일본인 2명이 있을 뿐이다. 로그의 이용 고등 학교에서 배우는 여러 가지 종류의 함수 중에 로그 함수가 있다. 계산 도구로서 로그의 힘은 곱 셈과 나눗셈을 좀더 손쉬운 연산인 덧셈과 뺄셈으로 바꿀 수 있다는 데 있다. 그래서 17세기 초 로그가 처음 등장했을 때 로그는 유럽 전체에서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특히 많은 계산을 해야 하는 천문학에서는 로그의 탄생만을 기다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로그는 천문학의 작업량을 줄임으로써 천문학자의 수명을 두 배로 만들었다”는 말을 들을 정도였으니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간다. 컴퓨터의 출현으로 계산 도구로서 로그의 가치는 많이 줄었다. 하지만 함수로서의 위치는 계속 고수하고 있다. 로그는 물리적 양을 매우 간편하게 표현하는 강점이 있기 때문에 일상 생활에서 접할 수 있는 몇 가지 수치를 나타내는 편리한 도구로 이용된다. 예를 들어 지진의 크기를 정하는 리히터 규모, 소리의 세기를 나타내는 데시벨(dB), 산성과 염기성을 알려주는 수소 이온 농도(pH)가 그것이다. 리히터 규모 1 차이는 에너지 32배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 각지에서 발생하는 지진의 소식을 접할 때 꼭 따라붙는 용어가 있다. 그것은 바로 ‘리히터 규모’라는 말이다. 물론 리히터 규모 말고도 ‘진도’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진도’는 지진에 대한 인간의 반응과 지진에 의한 피해의 정도를 기준으로 지진의 크기를 정한 오래된 척도다. 진도를 나타내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는데, 우리 나라에서 이용하는 ‘일본 기상청 진도 계급’은 0부터 7까지 8등급으로 나눠져 있다. 예를 들어 진도 2는 창문이 약간 흔들리는 정도를, 진도 3은 유리창이 가볍게 흔들리거나 찻잔이 약간 덜그럭거릴 정도의 지진을 말한다. 그런데 진도는 각 지점에서 지진의 세기를 나타내기 때문에 똑같은 지진이라도 지역에 따라 다르다. 따라서 지진을 분류할 때는 지진 자체의 크기를 어떤 척도에 따라 정량적으로 나타낼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현재 보편적으로 이용하는 방법이 1935년 리히터가 개발한 척도인 ‘규모’(magnitude)다. 지진의 규모는 진원지에서 1백km 떨어진 지점에서 지진계로 측정한 지진파의 최대 진폭에 따라 결정되는데, 지진파의 최대 진폭은 지진에 따라 대단히 큰 차이를 보인다. 이런 차이를 알기 쉽게 축소해 나타낸 것이 로그다. 지진파의 최대 진폭이 A미크론(1미크론=1천분의 1mm)인 지진의 규모 M은 상용 로그를 이용해 M log10 A(=log A)으로 정한다. 그러므로 지진의 최대 진폭이 10배씩 커질 때마다 지진의 규모는 1.0씩 증가한다( log 1=0, log 10=1, log 102=2, … log 10n=n). 그리고 지진의 규모(M)와 지진에 의해 발생하는 에너지(E) 사이에는 log E=11.4+1.5M라는 관계가 성립한다. 지진 규모의 값이 1 증가하면 에너지는 약 32배로 증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101.5 ≒ 31.6227 ≒ 32 자동차 내부 소음은 표준음의 1억배 언제부터인가 도심의 전광판에는 소음 공해의 심각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80데시벨(dB)’ 또는 ‘100dB’과 같은 수치가 등장했다. ‘데시벨(dB)’은 소리의 세기를 표준음의 세기와 비교해서 나타낸다. 표준음(진동수 1천Hz)은 정상적인 청각을 지닌 사람이 겨우 들을 수 있는 소리로 그 세기는 1m2 면적당 약 10-12W의 에너지를 나타낸다(10-12W/m2). 표준음의 세기를 Ⅰ0라 하고 어떤 소리의 세기를 Ⅰ라고 할 때, 이 소리의 세기를 데시벨로 환산한 수치 L은 상용 로그를 이용해서 구한다(L = 10 log Ⅰ/Ⅰ0). 일반적으로 대화를 나눌 경우가 60dB이고, 조용한 방은 30dB 정도가 된다. 자동차 내부에서 느끼는 소음의 정도인 80dB의 소리는 표준음의 세기의 1억배(108)이고, 전기톱 소리를 나타내는 100dB의 소리는 1백억 배를 의미한다. 이 소리들이 얼마나 큰 소음인지 짐작할 수 있다. 산성, 염기성 알려주는 수소이온농도, pH 대기 오염의 결과로 산성비가 내리고, 토양이 산성화되고 있다는 소식을 종종 듣는데 이 때 ‘pH4.5’ ‘pH5.2’와 같은 수치를 접하게 된다. 또 비누 선전에도 pH가 등장한다. 이런 수치는 용액 속의 수소이온농도를 측정해서 얻는다. 그런데 수소이온농도는 용액에 따라 대단히 큰 차이를 보이기 때문에, 이를 상용로그를 이용해서 수소이온 지수(pH)로 바꾸어 0부터 14까지의 수로 나타낸다. 1L의 용액 속에 있는 수소 이온의 그램 이온수를 나타내는 수소이온농도 [H+]를 pH로 바꾸는 공식은 pH=-log [H+]이다. 만약 수용액 중에 수소 이온이 1.0×10-7g 있다면 이때의 pH는 7이다. pH가 7인 용액은 중성, 7보다 작으면 산성, 7보다 크면 염기성이다. 수퍼마켓의 바코드 출생 신고를 하면서 부여되는 주민등록번호를 시작으로 학교와 직장에서의 번호, 전화 번호, 아파트 동수와 호수, 버스 번호, 전철과 도로 등 우리는 숫자와 생활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는 정말 만물을 지배하는 것일까. 슈퍼마켓과 서점에서 구입하는 대부분의 상품과 서적에도 숫자가 붙어있다. 이 숫자들은 여러 개의 검은 막대와 흰 막대를 달고 다닌다. 이것이 해당하는 숫자를 나타내는 바코드다. 스캐너로 읽히는 바코드는 판매 즉시 판매량과 금액 등 판매와 관련된 각종 정보를 신속하고 정확하게 집계해 재고 관리와 유통 업무를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도록 한다. 그런데 바코드가 잘 읽히지 않아 스캐너를 여러 번 접촉시키다가 결국에는 키보드로 숫자를 입력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바코드가 불명확하거나 유통 과정에서 손상되면, 스캐너는 다른 숫자로 읽을 수도 있다. 이런 문제에 대비해 바코드에는 체크 숫자라는 안전장치가 돼 있다. 이것은 상품의 정보를 간직한 고유 번호가 잘못 읽혀지는 것을 찾아내기 위한 숫자다. 상품 번호 우리 나라 상품에 붙어 있는 바코드는 유럽 상품 번호(EAN)를 따르고 있다. 통상 13개의 숫자로 이루어 지는데 처음 세 개의 숫자 ‘880’은 한국, 다음의 다섯 개는 제조업자이고, 그 다음 다섯 개는 상품을 나타내는 고유 번호인데 이중 마지막 숫자가 체크 숫자이다. 체크 숫자는 홀수번째 자리에 있는 숫자들을 그대로 더하고 짝수 번째 자리에 있는 숫자들은 3배해서 더한 전체의 합이(모듈 번호) 10의 배수가 되도록 정한다. 예를 들어 8801037002782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이렇게 체크 숫자를 정하면, 한 개의 숫자를 잘못 읽은 경우를 모두(100%) 찾아내고, 인접한 두 숫자를 바꾸어 입력한 경우도 ‘대부분’(정확하게는 88.9%) 찾아낼 수 있다. 이것은 짝수번째 자리의 숫자에 3을 곱하는 가중치를 둔 효과다. 상품 번호의 약점 중 하나는 인접한 두 숫자의 차가 5일 때, 이 두 숫자를 바꾸어 입력한 경우에는 오류를 찾아낼 수 없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위의 바코드에서 27을 72로 바꾸어 8801037007282로 입력했다고 하자. 그래도 결과는 10의 배수가 되므로 컴퓨터는 오류를 인식할 수 없다. 따라서 제조업자는 상품 번호를 정할 때 이런 경우를 미리 피해야 한다. 담배 같은 경우는 상품 번호가 8개의 숫자로(8800-9605) 이뤄졌다(그림2). 이런 경우에는 홀수 번째 자리에 있는 숫자들을 3배해서 더하고 짝수 번째에 있는 숫자들은 그대로 더한 전체의 합이 10의 배수가 되도록 체크 숫자를 정한다. 왜냐하면 체크 숫자에는 가중치가 곱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도서번호 책과 각종 음반물에는 국제 표준 도서 번호(ISBN)가 붙어있다. ISBN에 뒤이어 10개의 숫자가 하이펀(-)으로 구분돼 나타나는데, 여기서도 마지막 숫자가 체크 숫자이다. 10개의 숫자에 10부터 1까지의 자연수를 차례로 곱해서 더한 합이 11의 배수가 되도록 체크 숫자를 정한다. 11의 배수가 되기 위해서는 체크 숫자로 10을 이용할 경우가 생긴다. 이런 경우에는 X로 10을 대신한다. 예를 들어 ISBN 89-7282-108-X의 경우가 그렇다. 이렇게 체크 숫자를 정하면, 한 개의 숫자를 잘못 읽은 경우와 인접한 두 숫자를 바꾸어 입력한 경우를 모두(100%) 찾아낼 수 있다. 가중치를 주는 방법을 바꾸고 10 대신에 11이라는 소수를 이용한 효과다. 그런데 도서 번호는 바코드로 나타나 있지 않으므로 스캐너로 직접 읽을 수 없다. 이에 따라 도서 번호를 상품 번호로 바꾼 바코드를 함께 제시한다. 국내 단행본 번호 ‘978’ 뒤에 도서 번호의 처음 9개의 숫자를 그대로 적은 다음에 체크 숫자를 붙인다. 이때 체크 숫자는 상품 번호에서 이용한 방법으로 정한다. 예를 들면 ISBN 89-7282-108-X는 상품 번호로 978 897282108 3이 된다. 이 경우는 상품번호이므로 상품번호의 체크 숫자를 확인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잡지와 같은 연속 간행물에는 7자리의 고유 번호와 한 자리의 체크 숫자로 이루어진 국제 연속 간행물 번호(ISSN)를 붙이며, 상품 번호로 바꿀 때는 국내 연속 간행물 번호인 ‘977’을 앞세우고 고유 번호인 7개의 숫자, 예비 기호 ‘00’, 체크 숫자를 차례로 나열한다. 과학동아의 경우 ISSN 1228-3401에서 마지막 1이 체크 숫자다. 이때 각 숫자에 8부터 1까지의 숫자를 곱한 것이 11의 배수가 되도록 체크 숫자를 정한다. 필요해서 생긴 도형의 지식 지구에는 경도, 위도를 나타내는 여러 선들이 있다. 그러면 여행을 할 때, 적도를 나타내는 선을 본 적이 있는가? 또는 날짜 변경선을 나타내는 선을 본 적이 있는가? 이 선들은 모두 우리의 머리 속에 있는 선이지 실제로 지구 둘레에 금을 그어 놓은 것은 아니다. 100m 달리기를 할 때, 트랙을 그어 놓고 달려 보았을 것이다. 그러면 그 트랙은 직선일까? 아니, 선분이라도 될까? 그렇지 않다. 우리가 땅에 그어 놓은 선은 이미 직선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직선도 우리의 머리 속에 있는 선일 뿐 일단 표현되면 엄격한 의미에서 직선이라고 할 수 없다. 이렇게 이론과 실제가 다른 직선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 수학만이 아니라 우리 생활에서 직선이 없으면 얼마나 불편할지 생각해보라. 삼각형, 사각형을 못 그리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집을 짓기 위한 설계도도 그릴 수 없다. 유클리드는 선은 폭이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는 사가형, 100m 트랙, 설계도 등의 선은 폭이 있다. 이런 모순이 생기는 이유는 실생활에서 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필요하기 때문에 선이 생겨났고, 그 후에 선의 뜻을 정의해보려는 시도가 있었다. 유클리드가 해놓은 직선의 정의는 뒤에 힐버트에 의하여 폐기되었다. 힐버트는 점, 선 등을 무정의 용어라고 하여 정의없이 사용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면 60。는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고대 바빌로니아에서는 태양이 궤도 위를 약 360일만에 일주한다는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원으로 태양의 궤도를 본 떠서 태양의 하루 움직임을 길이가 원주의 인 호로 나타내었다. 그 결과 360의 인 60도 를 중요하게 여기게 된 것이다. 또, 원의 반지름으로 원의 둘레를 끊어 내접 정육각형을 만들면 60도가 만들어진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하여 60진법이 만들어졌고, 지급도 60진법이 쓰이는 것은 바빌로니아 시대로부터의 유산인 것이다. 그러면 직각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건축술이 발달함에 따라서 직각은 매우 중요한 척도가 되었다. 벽을 쌓거나 기둥을 세우는 사람들에게는 줄을 늘어뜨렸을 때, 어느 쪽으로나 같은 각을 이루는 것이 중요하였다. 이 때, 줄과 땅이 이루는 각이 직각인 것이다. 목성의 반점과 혼돈이론 목성의 거대한 붉은 반점은 이동하지도 수그러들지도 않는 거대한 폭풍처럼 광대하고 소용돌이치는 타원체로서, 우주의 신비로 치면 중급 정도의 것이다. 갈릴레오가 처음 망원경으로 목성을 관찰한 후 얼마 되지 않아 천문학자들은 그 거대한 혹성에서 반점을 발견했고, 지난 1세기 동안 많은 이론들이 줄지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예를 들면 "화산에서 흘러나온 용암으로 이루어진 타원형이 거대한 호수일 것이다." 라든지 "목성의 표면에서 생성되고 있는 새로운 달일 것이다." 등이 초기 이론이고, 그 반점이 목성을 배경으로 가볍게 떠 다니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 발견된 후에는 "달걀이 물에 떠다니듯 대기 중을 떠 다니는 다소 단단한 물체일 것이다."라고 생각했고, 그 반점은 떠다니기는 하지만 결코 멀리까지 떠다니지는 않는다는 점이 또 발견되면서 60년대에는 "분화구에서 솟아오르는 가스기둥의 윗 면일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1978년 보이저 2호가 목성에 근접 비행하면서 보내온 사진은 그 반점이 강풍과 형형색색의 소용돌이임을 보여 주었다. 장엄한 현장사진을 보고 천문학자들은 그 반점이 허리케인처럼 소용돌이 치는 흐름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그 반점은 목성의 수평띠를 이루는 동서풍지대에 자리잡고서 구름을 옆으로 밀쳐내고 있었다. 누가 생각해도 '허리케인'이 최선의 설명이었지만, 몇 가지 이유로 그것은 적절한 설명이 아니었다. 지구의 태풍은 습기가 빗물로 응축될 때 생기는 열에 의해 힘을 얻는다. 그러나 그 반점은 습기가 없이 움직인다. 붉은 반점이 회전하는 방향도 지구의 태풍과는 영 다른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은 지구의 태풍은 수일 내에 사라진다는 점이다. 보이저호는 목성의 반점 안에 있는 작은 흐름의 사진도 보내왔는데, 그 흐름들은 나타났다가 하루도 못되어 사라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붉은 반점은 그런 것들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 무엇이 그 반점을 움직이게 하는가? 또 무엇이 그 반점을 그 자리에 붙들어 두는가?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바로 혼돈(chaos)이론이었다. 응용수학자인 필립 마커스는 보이저호가 사진을 전송한 이래 붉은 반점을 연구하는 5∼6명의 과학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들은 목성의 반점과 비슷한 방식으로 움직이는 것을 찾아 내었는데, 그것은 멕시코 만류와 먼 바다에 때때로 나타나는 고기압대 였다. 마커스는 미항공우주국의 사진들을 오랜 시간 연구한 끝에, 일단의 유체방정식을 가지고 컴퓨터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목성의 날씨를 파악하는 것은 막대한 양의 농도 짙은 수소와 헬륨에 관한 법칙을 알아내는 것을 의미한다. 목성은 지구 시간으로 10시간에 한 번씩 자전을 한다. 자전으로 인한 강력한 힘이 그 반점을 움직이는 것이다. 마커스는 이 모델의 결과를 큰 컴퓨터를 이용하여 슬라이드와 활동사진으로 만들었다. 결과는 실물 사진과 놀랄 만큼 비슷했다. 목성의 반점은 자기 안에 예측할 수 없는 혼란한 움직임을 포함하고는 있지만, 그 혼란한 움직임으로 스스로를 규제하는 또 하나의 안정된 chaos였던 것이다. 목성의 반점과 같이 불규칙적이고 복잡한 현상도 방정식으로 그 움직임을 나타낼 수 있다니 얼마나 놀라운가! 세상을 보다 정확하게 파악해내는 것, 이것이 바로 과학(내지는 수학)의 매력인 것이다. 밀어주고 끌어주어야... 뉴턴과 라이프니쯔 17세기는 수학의 발전에 있어서 괄목할 만큼 풍요로운 시기였는데 그 중 가장 주목할 만한 업적이 바로 미적분학이다. 고등학교에서는 미분을 먼저 배우고 적분을 나중에 배우는데 역사적으로는 미분보다 적분이 먼저 발달되었다. 적분은 넓이나 부피, 호의 길이 등을 구하는 것과 관련되어 시작되었고 , 미분은 곡선의 접선과 함수의 최대· 최소에 관한 문제로 인하여 시작 되었다. 그리고 한참 지난 후, 적분과 미분의 관계가 더하기와 빼기 또는 곱하기와 나누기처럼 서로 반대되는 과정이라는 것이 알려지게 되었다. 오늘날에도 수학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미적분학의 발견은 뉴턴과 라이프니쯔가 해낸 일이다. 라이프니쯔는 원래 법관이었는데 26살에 파리에 있을 때, 수학자 호이겐스를 만나 수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게 되었다. 그는 1673년과 76년 사이에 미적분학을 고안하여 발표하였다. 뉴턴은 1660년대 후반에 이것을 발견하였으나 발표는 늦어졌다. 그런데 이것 때문에 심각한 일이 벌어졌다. 영국과 유럽이 뉴턴과 라이프니쯔 중에 누가 먼저 미적분학을 고안하였는지에 대한 논쟁을 벌이게 된 것이다. 지금은 두 사람이 서로 독립적으로 미적분학을 발견하였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 논쟁으로 인해 영국과 유럽 대륙 사이에는 수학 교류가 끊기게 되고, 그 결과 영국의 수학 발전이 거의 100년이나 늦어지게 된다. 그러면 뉴턴은 왜 발표를 미루었을까? 1669년 광학에 대한 논문을 발표한 후, 뉴턴은 일부 과학자들로부터 격렬한 공격을 받았다. 뉴턴은 그러한 논쟁이 너무 지겨워 과학에 관한 어떤 것도 다시는 발표하지 않으리라 맹세하였다고 한다. 현재 알려져 있는 그의 모든 논문들은 발견한지 수년이 지난 후에 친구들의 성화에 못 이겨 발표된 것이라 한다. 축구하는 사람이 많은 나라에서 훌륭한 축구 선수가 나오기 쉬운 것처럼 수학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고, 수학을 공부하는 사람도 많으며, 수학자들이 서로 격려하면서 열심히 연구하는 나라에서 훌륭한 수학자가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고정관념 깨기 -원과 케플러- 태고 때부터 인간은 대칭성을 아름다움을 판단하는 기준의 하나로 삼아왔던 모양이다. 정다각형, 원, 정다면체, 구와 같은 도형에 수많은 학자들이 매료되었고, 이 도형들의 성질을 연구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얼토 당토 하지도 않는 철학적 의미까지 부여하고자 한 것이 그 증거라 할 수 있다. 행성의 공전 궤도와 운동에 관한 3가지 법칙을 정리한 케플러도 대칭성에 매료되고 대칭이 주는 완전성을 맹신한 나머지 수많은 오류를 범했던 대표적인 천문학자이다. 망원경이 급속하게 발달하면서 천체에 대한 관측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여러 가지 행성들에 대한 자료가 쏟아지게 되었다. 케플러는 이런 자료들을 근거로 행성의 궤도로 적당한 도형을 찾는데 무려 8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케플러의 발목을 잡은 것은 고정관념이었다.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행성들은 당연히 원 궤도를 따라 움직일 것이라 생각했다. 가장 완벽한 대칭성을 가진 원을 따라 행성이 움직이고 그리하여 우주가 완전한 조화를 이룬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 않은가. 화성의 관측 기록을 접한 케플러는 일주일 안에 수수께끼를 풀겠다고 호언장담한다. 그러나 원 궤도로 계산한 화성의 공전주기와 실제로 관측한 자료와는 몇 분간의 오차가 발생하였고, 이 오차를 무시할 수 없었던 케플러는 결국 8년간의 고심 끝에 원을 집어 던지고 타원을 행성의 궤도로 받아들이게 된다. 고정관념은 밑 빠진 독과 같아서 터무니없는 시간과 열정을 쏟아 붓게 하는 모양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고정관념의 미로에 갇혀 해답을 찾는데 많은 노력을 바쳤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런 노력이 없었다면, 또 조그만 오차도 용납하지 않는 정신이 없었다면 지금까지의 발전을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고정관념을 깨는 것이 곧 위대한 발견의 시작인 것이다. 데카르트 2 : 식과 도형을 연결하다 중학 수학에서 일차방정식, 이차방정식과 같은 대수 문제는 쉽게 해결하면서 삼각형, 사각형, 원과 같은 도형 문제에서 해를 구하는 데는 어려움을 겪는 학생들이 많이 있다. 특히 전혀 예상치 못했던 보조선을 그어야 풀 수 있는 도형 문제는 수학에 어느 정도 자신감이 있는 학생들에게조차 당혹스러울 때가 많다. 이런 점에서 유클리드 기하학의 '비논리적 비약'에 불만을 느낀 데카르트는 일찍이 대수학에 관심을 두었다. 대수는 기하와는 전개 방식이 좀 다르다. 기하학이 종합적인 데 반해 대수학은 분석적, 또는 해석적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방정식을 풀 때, 그 값을 알지 못하는 미지수를 x라 놓고 마치 알고 있는 것처럼 취급하여 '2x+3=7'와 같은 결론을 얻으면 그 후의 순서는 기계적 조작만으로 그 해를 구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데카르트는 대수학의 기호화에도 큰 노력을 기울여 오늘날처럼 상수는 미지수는 으로 나타내었다. 와 같은 기호의 사용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냐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그의 이전에는 과 같이 간단한 표현을 'A quardratum, B solidum' 또는 'AA, BBB'와 같이 사용하였다고 하니 그의 기호법이 얼마나 간단하고 시각적인가를 알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대수학에 대한 그의 관심은 대수학과 기하학을 하나로 묶은 '해석기하학 덕분에 변화의 개념은 없고 도형의 성질만을 연구하던 유클리드 기하학의 한계가 극복되었고 수학이 과학을 발전시키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평생에 걸쳐 근대 과학의 터전을 닦은 그는 1649년 크리스티나 여왕의 초대로 스웨덴으로 간지 몇 달 후 북유럽의 차가운 날씨 때문에 폐렴에 걸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는 "내가 바라는 것은 평온과 휴식뿐이다."라는 평소의 그의 말처럼 54세의 일기로 영원한 휴식을 취하게 되었다. 출저 네이버지식  rhehd33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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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루아<Galois, Evariste>(1811.10.25~1832.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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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생디<Gassendi, Pierre>(1592.1.22~1655.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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