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토어는 러시아 성 페테르부르크 태생의 독일 수학자로, 집합론의 창시자다. 칸토어가 창시한 무한집합론은 현대 수학의 기반이 되고 있다. 칸토어의 아버지는 성공한 상인으로 성 페테르부르크의 주식 환전 브로커 역할도 했다고 한다. 덴마크 출신의 아버지는 예술과 문화에도 조예가 깊었다. 칸토어의 어머니는 러시아 출신으로 음악을 좋아했다고 한다. 이런 영향으로 칸토어는 뛰어난 바이올린 연주가로 음악과 예술적 재능을 부모로부터 물려받았다. 칸토어는 매우 예술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건축과 음악에도 뛰어났다. 독일에는 그가 설계한 건축물이 아직도 남아 있다. 1856년 초등학교에 입학했고 열두 살이 되던 해 아버지의 건강상의 이유로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이주했다. 수학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던 칸토어는 1860년 뛰어난 성적으로 김나지움을 졸업했다. 이후 1862년 취리히 공과대학에 입학했지만 그를 공학자로 만들고 싶어했던 아버지를 설득해 수학으로 전공을 바뀠다. 1863년 아버지가 눈을 감고 난 후 당시 유명한 독일 수학자 바이에스트라스와 크로네커에게 가르침을 받기 위해 베를린 대학으로 이적한다. 그곳에서 그는 슈바르츠를 사귀었고 수학, 철학, 물리학 등을 공부했다. 칸토어의 첫 논문은 스승인 바이에스트라스의 영향을 받아 삼각함수열에 관한 것을 다뤘다. 베를린 대학 시절 1864년부터 1865년까지 수학협회 회장직을 맡았다. 또한 젊은 수학자들의 소모임 회원이기도 했다. 1867년 베를린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여학교에서 잠시 수학을 가르쳤다. 1869년 할레 대학의 교수로 자리를 잡고 1913년 은퇴할 때까지 줄곧 할레 대학의 강단에 섰다. 할레 대학에서 그의 관심사는 정수론에서 해석학으로 바뀌었다. 1869년에서 1873년 사이의 10편에 걸친 논문시리즈는 정수론에 관한 것이었다. 이후 무한급수론에 관심을 가졌고 이것이 무한 개념을 창시하게끔 만들었다. 데데킨트와 수학적 교류를 하면서 많은 문제들을 풀어갔다. 신혼여행을 스위스로 갔으나 여행기간 대부분을 데데킨트와 수학적 토론을 하는데 쏟아 부었다고 한다. 칸토어의 수학적 업적으로는 집합론의 기초를 다진 것을 들 수 있다. 1879년부터 1884년까지 집합론의 기초적인 개념을 설명하는 여섯 권의 시리즈 '수학저널'을 출판했다. 29세의 젊은 나이로 혁명적인 논문을 발표한 것이다. 다른 분야와는 달리 집합론이 태어난 것은 오로지 한 수학자에 의해서였다. 집합의 개념과 연산법칙은 칸토어 이전부터 사용되고 있었다. 집합의 개념이 칸토어 이전에 존재했지만 그를 집합론의 창시자라고 칭하는 이유는 무한의 개념을 집합을 이용해 명확히 규명해냈기 때문이다. 칸토어가 집합론의 생각을 발전시키는데는 데데킨트와의 교류가 큰 역할을 했다. 데데킨트의 추상적 사고 방식은 칸토어를 감화 시켰다. 칸토어의 집합론은 현대수학 발전의 원동력이 됐다. 칸토어는 차원이론 발전에도 공헌했다. 칸토어는 당시 젊은 수학자 힐베르트나 러셀, 제르멜로에게 영향을 끼쳤다. 무엇보다도 수학적으로 중요한 개념인 '무한'개념의 도입은 수학사에 있어 획기적인 전환의 발판을 제공했다. 그는 자연수와 유리수가 일대일 대응관계에 있음을 증명했고 단위선분과 단위사각형 사이에 일대일 대응 관계가 존재하는가에도 관심을 가졌다. 무한의 양을 측정하는 개념도 도입했다. 이전까지 무한을 다루는 것은 수학계의 금기사항으로 유한만을 다뤘다. 가우스는 무한이란 수학적 가치가 없다고 말했다 (정의하기가 곤란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된다). 무한은 인간이 셈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다는 의미로 쓰였다. 대부분의 수학자들이 가우스의 의견을 따랐다. 모두들 피해갔던 난제의 돌파구를 칸토어가 마련한 것이다. 칸토어의 무한개념은 철학적 사고의 전환을 가져왔고 자연과학뿐 아니라 인문과학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혹자는 '위대한 혁명'으로 묘사했다. 하지만 그의 업적은 많은 수학자들에 의해 배척됐고 스승 크로네커마저도 그를 공격했다. 크로네커는 칸토어의 새로운 사고에 독설을 퍼부었다. 크로네커는 수에는 정수, 음수, 분수와, 허수만이 있고 무리수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수로 간주했다. 크로네커는 칸토어가 제반 수학에 도전하는 것이라며 불같이 화를 냈다고 한다. 그는 칸토어가 꿈에 그리던 베를린 대학 교수의 길도 막아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토어는 자신이 발견한 집합론의 패러독스 발견을 확신했다. 출저 네이버지식인
번호 | 제목 | 날짜 |
---|---|---|
182 | 가우스 | 2016.04.16 |
181 | 파스칼 | 2016.04.16 |
180 | 아르키메데스 | 2016.04.16 |
179 | 가우스 | 2011.11.01 |
178 | 파스칼 | 2011.11.01 |
177 | 아르키메데스 | 2011.11.01 |
176 | 피타고라스 | 2011.11.01 |
175 | 유클리드 | 2011.11.01 |
174 | 르네 데카르트 | 2011.11.01 |
173 | G. W. 라이프니쯔 | 2011.11.01 |
172 | 미분귀신 | 2011.11.01 |
171 | 수학에 관한 이야기 | 2011.11.01 |
» | 칸토어 | 2011.11.01 |
169 | 갈릴레이<Galilei, Galileo>(1564.2.15~1642.1.8) | 2011.11.01 |
168 | 뉴턴<Newton, Isaac>(1642.12.25~1727.3.20) | 2011.11.01 |
167 | 원주율의 역사는? | 2011.11.01 |
166 | 0의 발전과 0이 갖는 의미 | 2011.11.01 |
165 | 피타고라스학파의 수비학(數秘學) | 2011.11.01 |
164 | 가르베르스<Garbers, Karl>(1898.5.16) | 2011.11.01 |
163 | 가생디<Gassendi, Pierre>(1592.1.22~1655.10.24) | 2011.11.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