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벨(1802.8.5~1829.4.6)노르웨이의 수학자. 오슬로 근교 핀드 출생. 가난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18세 때 아버지를 잃고 가난과 싸우면서도 수학공부에 뜻을 두었다. 다행히 뒷날 《아벨 전집》을 편집한 친구 B.M.홀름보에의 도움으로 크리스티아니아대학(지금의 오슬로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19세 때에는 그때까지 약 3세기 동안 수학상의 어려운 문제로 남아 있던 5차방정식의 대수적 일반해법(代數的一般解法)을 연구하여, 그 불가해성(不可解性)을 증명하였다. 아벨은 5차방정식에 관한 논문을 자비(自費)로 인쇄하여, 그 일부를 당시 수학계의 제1인자였던 K.F.가우스에게 보냈으나, 가우스는 그것을 읽어 보지도 않고 쓰레기통에 버렸다고 한다. 1822년 크리스티아니아대학을 졸업한 아벨은 홀름보에의 주선으로 정부 보조금을 얻어 수학연구를 계속하였으며, 25년에 독일·프랑스로 유학할 수 있게 되었다. 독일 괴팅겐에는 가우스가 있었기 때문에 아벨은 괴팅겐을 피하여 베를린으로 갔고 거기에서 A.L.크렐레와 만나게 되었다. 크렐레는 아벨의 협력을 얻어 26년에 수학연구의 전문지인 《순수수학 및 응용수학 잡지》를 창간하고, 여기에 아벨의 논문을 게재하여 그 업적을 세상에 소개하였다. 아벨은 이어 프라이부르크, 드레스덴, 빈 등을 거쳐 이탈리아, 스위스, 파리로 갔으며, 그 동안에 ‘아벨의 정리(定理)’를 포함한 타원함수론을 써서 파리에 있는 프랑스 학사원(學士院)에 제출하였다. 그러나 거기에서도 인정을 받지 못한 채 병을 얻어 이듬해 27년에 베를린을 거쳐 귀국하였다. 귀국 후에도 고생스러운 연구를 계속하여, 타원함수론에 관한 우수한 논문들을 발표하였다. 29년 1월 신병이 악화되어 건강이 극도로 나빴으나, 프랑스 학사원에 제출했던 당시 아직 발표하지 않은 논문의 사상을 발전시켜 대수함수(代數函數)에 관한 ‘아벨의 정리’를 증명한 유명한 논문을 써서 베를린의 크렐레에게 보였다. 이 무렵에야 그의 업적이 수학계에 알려져 높이 평가되었고, 베를린대학에서 그를 교수로 초대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초대장이 도착되기 이틀 전에 아벨은 26세의 불행한 생애를 마쳤다. 그의 이름은 ‘아벨의 적분(積分)’ ‘아벨의 정리’ ‘아벨방정식’ ‘아벨군(群)’ 등 오늘날 사용되고 있는 많은 수학용어 속에 살아 있어, 수학계 불후의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