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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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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 스 칼
Blaise Pascal : 1623 - 1662 


프랑스의 수학자이며, 물리학자. 종교철학자이자 작가이기도 하다. 근대 확률이론을 창시했고, 압력에 관한 원리를 체계화했으며, 신의 존재는 이성이 아니라 심성을 통해 체험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종교적 독단론을 설파했다. 직관론에 바탕을 둔 그의 사상은 장 자크 루소와 앙리 베르그송 및 실존주의자 등 후세의 철학자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아버지 에티엔 파스칼은 클레르몽페랑에 있는 세무 법원 판사였다. 1626년 어머니가 죽고 1631년 파스칼의 가족은 파리로 이사했다. 존경받는 수학자였던 에티엔은 파리로 옮겨온 뒤에는 자식 교육에만 전념했다. 2세 아래인 누이 자클린이 문단에서 신동으로 두각을 나타내는 동안, 파스칼은 수학분야에서 그에 못지않은 천재성을 발휘했다.
1640년 그는 종합 사영(射影) 기하학에 관한 지라르 데자르그의 저서를 연구하여, 그 결과를 가지고 《원뿔곡선론, Essai pour les coniques》을 썼다. 이 책은 수학계에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프랑스의 위대한 합리주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르네 데카르트 같은 사람조차도 시샘할 정도였다. 1642~1644년 파스칼은 아버지(1639년에 루앙 시 행정관으로 임명되었음)의 세금 계산을 도우려고 계산기(파스칼 계산기)를 착안하여 발명했다. 파스칼의 동시대인들은 이 기계만으로도 파스칼이 명성을 누릴 자격은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들이 그렇게 생각한 것은 당연했다. 어떤 의미에서 이 기계는 최초의 디지털 계산기였기 때문이다. 1646년까지만 해도 파스칼 일가는 겸손을 신앙으로 여기는 경우도 종종 있었지만, 가톨릭 교리를 엄격하게 지키는 독실한 신자였다. 그러나 우연한 사건으로 파스칼은 보다 심오한 종교 세계와 만나게 되었다. 아버지가 아플 때 두 사도를 만난 것이 그 계기였다. 포르루아얄 수도원 원장이었던 생시랑 신부의 수도원 생활과 사상에 얀센이 창시한 얀센주의의 엄격한 도덕과 신앙을 도입했다. 얀센주의는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17세기 형태의 성 아우구스티누스주의였다. 얀센주의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거부하고 신의 예정설을 채택했으며, 구원의 열쇠는 인간의 선행이 아니라 신의 은총이라고 가르쳤다. 포르루아얄 수도원은 얀센주의 종파의 본산이 되었다. 속세에서 신에게로 완전히 전향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 첫번째 사람은 파스칼 자신이었으며, 그는 1646년 가족들까지 설득하여 얀센주의적 신앙생활로 돌아서게 만들었다. 그의 편지들을 보면 그가 오랫동안 가족의 정신적 조언자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세계와 금욕 생활 사이에서 겪는 내적 갈등은 아직 해결되지 않은 상태였다. 다시금 과학적 흥미에 빠져든 파스칼은 갈릴레오와 에반젤리스타 토리첼리(기압계 원리를 발견한 이탈리아의 물리학자)의 이론을 검증했다.

그러던 중에 그는 수은 기압계를 만들어 파리와 클레르몽페랑이 내려다보이는 산꼭대기에서 기압을 측정하여 대기압에 관한 실험을 검증하고 확대시켰다. 이 실험결과는 유체동역학과 유체정역학에서 좀더 진전된 연구가 이루어지는 데 길잡이가 되었다. 또한, 실험 과정에서 파스칼은 주사기를 발명했으며, 파스칼의 원리(밀폐된 유체에 주어진 압력은 그 압력이 주어진 범위에 관계없이 모든 방향에 같게 전달됨)를 바탕으로 유압 프레스를 고안해냈다. 1647~1648년 진공 문제에 관한 논문을 잇달아 발표하여 더욱 명성을 얻었다. 그는 과로로 병이 났고, 의사들은 더 이상 연구에 몰두하지 말고 기분을 전환하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파스칼은 여전히 과학 연구에 몰두함으로써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쳤다. 이 기간(1651~1654)에 그는 액체평형에 관해서, 공기의 무게와 밀도에 관해서 또 산술 3각형에 관해서 논문을 썼다. 특히 산술 3각형에서는 확률 계산의 토대를 마련했다. 그러나 1653년말에 종교적 가책을 느끼기 시작한 파스칼은 1654년 11월 23일 밤에 '은총의 불'을 경험하고, 이것이야말로 새 삶의 시작을 알리는 신의 계시라고 믿었다. 이듬해 1월 포르루아얄 수도원에 들어간 그는 비록 은둔자가 되지는 못했지만, 그들의 요구에 응하는 글을 쓰면서 여생을 보냈고, 저서를 발표할 때도 자기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그가 《시골친구에게 쓴 편지, Les Provinciales》와 《명상록, Pensees》이라는 제목으로 널리 알려진 두 저서를 집필한 것은 그가 포르루아얄 수도원에 입문한 것과 거의 같은 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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